우리의 역사

첫 지점 ‘후야 젠지로’

아자부 나가사카 ‘사라시나’ 첫 지점으로 개업한 것은 쓰키지 ‘사라시나노사토’ 초대 점주인 아카쓰카 젠지로이다. 젠지로는 1876년생. 어머니 마키는 신바시 로게쓰초(현재 신바시 5초메 부근)에 있던 메밀국숫집 딸로 쌀장수에게 시집갔는데 1800년대 중반의 혼란 속에서 가업이 폐업했다. 젠지로가 본점에 고용살이를 하게 된 것은 8살 때였다.
메밀국수 장인으로서 젠지로의 실력은 뛰어나게 두드러졌던 모양이라, 17~18세 무렵에는 본점의 주방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어머니 마키는 긴자 신치(현 긴자 5초메 부근)에 이전했던 친가의 메밀국숫집에 의탁해 젠지로의 동생 4명을 키웠다.
본점에서 15년간 수련한 젠지로는 1899년, 23세로 독립했다.
장소는 후카가와 사가초, 간판은 ‘아자부 나가사카 사라시나 지점 후야 젠지로’였다.
가게 입지는 장사하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으나, 마침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있던 시기여서 군수 경기의 영향이 상업 지역이던 후카가와에도 미쳤다. 이런 배경도 작용하여 경영은 순조롭게 궤도에 올랐고, 1912년에는 도쿄에서 손꼽히는 유흥가로 번창했던 우시고메 가구라자카로 이전했다. 이때의 간판은 ‘나가사카 사라시나 우시고메토리 데라마치 지점’이다. 간판에서 ‘아자부’라는 글자가 빠졌는데, 그 전 해에 아자부 나가사카초가 아자부라는 명칭을 떼고 나가사카초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시고메 지점은 간토 대지진에도 무사하여 아자부 나가사카 ‘사라시나’의 지점으로서 명성을 높여 갔다. 젠지로는 만년인 1939년에는 대도쿄 메밀국수상 조합의 조합장도 맡았으나, 안타깝게도 병으로 쓰러져 1941년에 세상을 떠났다.
덧붙여, 본점 직원 중 분점을 허락받은 것은 젠지로 외에는 한 군데뿐으로, 1900년대 초에 ‘시바니혼에노키 니시마치 지점’이 문을 열었다. 이후 이 가게는 ‘가키노키자카 사라시나’ 등을 배출했으나 전시에 강제 분산 대피령으로 인해 폐업했다.

‘사라시나노사토’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부흥

젠지로의 후계를 이어받은 것은 1936년에 데릴사위가 된 마사하루다. 그러나 이미 전시 체제였기 때문에 마사하루는 1944년에 출정했고 가게는 강제 분산 대피령으로 폐쇄됐다. 3대 점주인 쇼지는 그 사이인 1943년에 태어났다. 쇼지의 누나이자 1937년에 태어난 마사미는 3월 10일 도쿄 대공습을 본 이후 도치기현 사노시로 대피한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했다.
“이때 가지고 간 것은 쌀이나 채소로 바꿀 수 있을 만한 것뿐이었고, 가게 간판은 근처 닭 요릿집에 줘 버렸습니다. 돌아오신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제 메밀국숫집은 하지 않겠다며 몹시 화내셨다고 합니다.”
그 말대로 마사하루는 청과업으로 업종을 바꾸어 전쟁 전에 이름을 날렸던 메밀국수 가게 ‘우시고메 사라시나’는 폐업했다. 그 메밀국수집을 재개한 것이 쇼지로, 대학 졸업 후에 동문 ‘누노쓰네 사라시나’에서 수련한 뒤, 1967년에 가게를 열었다. 마사하루도 폐업한 것을 후회했던 모양인지, ‘사라시나노사토’라는 가게 이름은 마사하루가 고안했다고 한다.
가게가 있는 위치는 초대 젠지로의 어머니 마키가 친가로부터 양도받은 땅으로, 당초 긴자였으나 지진 후 구획 정리의 대체지로 쓰키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 땅에는 전쟁 전부터 나가야라는 칸막이 주택이 세워져 있어, 대피했던 곳에서 돌아왔을 때는 잠시 세 든 사람과 한구석에서 동거했다고 한다. 가게를 연 당시에는 해당 나가야의 한쪽을 개조하여 만든 20석 정도로 작은 가게였으나, 3년 후인 1970년에 새로 지어 50석 규모가 되었다. 이후, 1977년에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3층 건물을 신축했는데 이때 배달을 그만두고 완전 수타로 전환했다.
‘처음에는 면을 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 유리로 하지 않았습니다.’라며 쇼지는 웃었다. 1990년에는 빌딩으로 재건축해 자가 제분도 도입했다.
나아가 2003년 5월에는 같은 쓰키지 내의 아주 가까운 장소로 이전했다. 쇼지의 장남인 시게유키가 4대 점주로 이어받았다.

출처: <메밀국숫집의 계보> (고분샤 지에노모리 문고) 이와사키 신야 저